First에서 Best로!
병원 40년을 이끈 주역들

1980년대 허허벌판 불모지였던 강남지역이 ‘의료 1번지’로 변모하기까지, 강남세브란스병원이 최초(First)에서 최고(Best)로 나아가기까지 많은 교직원의 헌신과 땀방울이 있었다. 특히 기관을 아우르며 단단한 내부 화합을 이끌고, 혁신적 행보로 병원 경영을 이끌었던 ‘덕장’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강남세브란스병원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40년간 병원을 이끈 주역들을 살펴본다.

 유승흠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유승흠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대한민국 건강보험의 탄생과 발전에 기여하고 병원 경영의 선진화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한 학자. 연세대보건대학원장, 대한민국의학한림원 원장, (재)한국의학원 이사장, 대한예방의학회 이사장, 학교법인 유한학원 이사장, 필란트로피 소사이어티 초대 회장 등을 역임했다. 대한민국 홍조근정훈장, 황조근정훈장을 받았으며, 현재 의료 소외계층에 의료비, 약제비를 모금·지원하는 한국의료지원재단 이사장으로서 활발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김효규 의료원장

김효규 의료원장은 남다른 경력을 가졌다. 1941년 12월 연세의대를 졸업하고 서울대병원에서 소아과 전문의 수련을 받은 후 개원했다. 이후 1970년에 의과대학 총동창회장에 선임됐다. 동문회보를 창간해 위원장에 김제현(생화학, 1956년 졸업), 간사로 유승흠(예방의학, 1970년 졸업)을 위촉했다. 1972년 연세의료원에 없던 일이 생겼다. 세브란스에서 근무한 경력이 전혀 없는 김효규 동창회장이 의료원장으로 임명된 것이다. 세브란스병원장은 당분간 본인이 겸직하면서 의료원장의 권한과 책임이 정착되도록 했다. 김 의료원장은 종종 필자를 불러 북아현동 자택에 데리고 가서 저녁을 같이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의료원장 10년’이란 이력은 선교사를 제외하고는 전례가 없다. 병원장으로 8년(1964~1972)간 근무한 임의선(1941년 졸업) 원장 때에는 의료원장이 재정을 관장할 여력이 없었고 병원장이 결정권을 가졌다. 김 의료원장은 의료원장 취임 직후 의료원 주간소식을 발간했다. 의료원장 비서가 부서별 한 주간 소식을 취합하면, 토요일 점심 직후에 예방의학 조교인 필자가 의료원장실에 가서 편집을 했다. 의료원 구성원들이 의료원 현황을 잘 파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1981년 9월에는 의학전문지기자를 홍보담당자로 채용해 의료원 소식지를 인쇄 출판했다. 의료원장으로 재직 중 대우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선임(1976)되었는데, 전남 도서지역(신안, 진도, 완도)과 전북 무주군에 대우병원을 건립했다. 정년 퇴임 후에는 아주대학교 총장으로 10년간 활약했다.

양재모 의료원장

1948년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미시간 보건대학원에서 보건학 석사를 하고 1954년에 귀국했다. 의과대학 학생과장으로서 국내 최초로 담임반 제도를 도입했고, 교무과장을 역임했다. 1961년에 대한가족계획협회를 만들어서 회장으로서 가족계획과 모자보건 영역을 체계화했고, 영아사망률을 대폭 낮췄으며, 우리나라 가족계획사업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데 공헌했다. 이에 미국 존스홉킨스 보건대학원 초빙교수로 1965년에 초청받아 도미하여 6개월간 근무했다.

1972년에 의과대학 학장으로 임명받았다. CMB 재정지원으로 의과대학 건물을 신증축했고, 독일 후원기관의 재정지원으로 1974년에 경기도 강화군에 지역사회 보건사업을 하면서 숙박시설을 건축해 이곳에서 의대 4학년 예방의학 지역사회보건 실습을 2주간 하도록 했다.

의과대학 행정에 새로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국내 최초로 4년제 보건대학 과정을 원주캠퍼스에 신설해 보건행정, 병원경영, 물리치료, 환경보건, 의무기록, 의용공학 등 6개 전공 영역을 신설했다. 1977년에는 보건대학원을 설립했다.

1982년에 의료원장으로 취임해 1960년대 졸업생 김영명을 강남세브란스병원장에 임명, 병원 경영 활성화를 꾀했다. 또 의과대학 부속병원 장기계획(안)을 검토하는 위원회를 구성해 의료원의 청사진을 그렸다.

강남세브란스 설립 전 항공사진

강남세브란스병원 개원 초

현재 강남세브란스병원 전경

김영명 병원장

1960년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이비인후과 수련과 군 복무를 마친 후 1968년에 전임강사로 근무했다. 일본, 미국, 프랑스에서 해외 연수를 받은 후, 연세대 의과대학 학생과장으로 8년 동안 활동했다. 강남세브란스병원 개원 전해인 1982년에 부임해, 6년 동안 재임하며 강남세브란스병원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은 인물로도 회자된다.

김영명 병원장은 병원장 시절 ‘단합’과 ‘경청’에 힘썼던 병원장으로도 알려져 있다. 병원이 잘 되기 위해서는 단합이 우선돼야 한다는 생각에, 일 년에 한두번은 휴양지에서 1박 2일 일정으로 중간 관리자 세미나를 열어 병원의 문제와 해결방안을 이야기하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정년 퇴임 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초청을 받아서 의무부총장 겸 의료원장(1992~96년), 목동병원장으로 활동했다. 인기 있는 병원장으로 인정받아 그 후 건국대학교 의과대학 의무부총장 겸 의료원장(1996~99년)으로 활약했다.

김영명 병원장은 우리나라 의학교육을 체계화하는 데 선구자로서 꾸준하게 기여했다. 대한의학교육학회 회장, 대한의학교육협의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대한의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김병길 병원장

1961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생리학교실 조교로 수련했다. 군 복무 후 소아과 수련을 마치고 전임강사로 부임했다. 1974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소아과 전공의, 소아신장 연구강사 과정을 수료하고 4년 뒤에 귀국해 조교수로 근무했다.

대한신장학회 초대 이사장을 역임하고, 소아신장학회를 창립했으며, 연세대학교 신장질환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우리나라 신장학 영역을 이끌었다. 대한의사협회 공보이사, 학술이사를 6년간 담당했다. 대한민국의학한림원 초대 부원장, 2대 원장으로 활동했다.

김병길 병원장은 1981년부터 1983년까지 세브란스병원 부원장을 맡은 데 이어, 1988년부터 1992년까지는 강남세브란스병원장을 맡아 올림픽 주 후송병원으로서 성공적인 의료 지원을 이끌어냈다. 김 병원장은 시대의 흐름을 읽고, 병원 경영에 녹여낸 탁월한 리더이기도 했다. 건강검진센터를 개소하는 한편, 환자들의 니즈를 반영해 국내 최초로 노인병센터를 개설했다.

MRI 기기도 세브란스병원보다 1년 앞서 도입하는 등, 병원 운영을 위한 투자와 도전을 아끼지 않은 덕에 개원 초기 발생한 모든 부채를 해결했다.

의과대학 정년 퇴임(2002년) 후 관동대학교 의과대학 명지병원장으로 부임했으며, 2012년에는 경기도의료원 의정부병원 병원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