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스포츠
빅 이벤트 의무지원으로
‘세브란스’ 이름을 높이다

1980년대에 접어들며 연세의료원을 찾는 환자가 급증했다. 환자가 증가함에 따라 의료원 조직은 점차 규모가 커졌고 효율적인 관리와 운영을 위한 여러 방안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강남세브란스병원이 개원한 이듬해(1984년)에는 ‘의과대학 부속병원 장기계획(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했으며, 1985년 1월에는 의료원 발전과 신설 병원의 역할을 검토할 연구위원회가 구성됐다. 김주덕 교수가 위원장을 맡았으며 이경식·이명진·고윤웅·유승흠 교수가 위원으로 선임됐다. 연구위원회는 신설 병원별로 관리와 운영 현황을 파악했으며, 실질적인 과제들을 구체적으로 검토해나갔다.

 유승흠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성장·발전하는
강남지역 대표 병원으로 자리매김

정부가 적극적으로 강남을 개발하기 시작하면서 해당 지역의 성장·발전 속도가 하루가 다르게 달라졌다. ‘상전벽해(桑田碧海: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가 되었다는 뜻으로 세상이 몰라보게 달라졌음을 의미함)’라는 말이 어울리는 1980년대 초 강남에 연세의료원 소속의 두 번째 세브란스병원인 영동세브란스병원이 우뚝 솟아 운영됐다. 당연히 영동세브란스병원은 동문의 자랑거리가 됐다. 개원 병원장에 김영명 교수(1960년 졸업)가 임명됐다. 연세의료원에서 1960년대 졸업생으로 병원장에 오른 첫 번째 사례였다. 젊은 리더들을 중심으로 모든 교직원이 열정적으로 환자를 돌보고 지역 보건 향상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헌신적인 자세로 업무에 임했다.

병원 주변 환경도 날이 갈수록 큰 변화를 겪었다. 먼저 서울시에서 매봉산 밑을 관통하는 매봉터널을 건립하려고 ‘터널건립평가위원회’를 구성했다. 터널 건립과 관련해 병원 출입 도로를 확보하는 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출입로 확보의 중요성과 구조적 문제점을 알게 된 필자는 토목공학을 전공한 친구를 통해 당시 터널건립평가위원회 위원 몇 사람을 소개받았다. 이들과 지속적으로 만나면서 병원 출입 도로가 지녀야 할 목적성과 갖춰야 할 요건을 반복하여 설명했다.

응급환자 수송에 사용되는 구급차와 거동이 불편한 환자를 태운 승용차가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어야 하고, 의료 기자재를 공급하는 대형 차량이 기자재를 내려놓으려면 출입구가 넓어야 하며, 자연스레 반대편 차선으로 차량이 다닐 수 있도록 도로 폭이 확보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행스럽게도 터널건립평가위원회가 병원 측이 제안한 조건을 수용하는 결실을 맺었다. 터널 건립과 관련해 꼬여 있던 병원 출입 도로 과제가 해결된 순간이었다.

세브란스의 이름을 드높인
스포츠 빅 이벤트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은 새로이 탄생한 영동세브란스병원의 위상과 높은 의료 수준을 우리나라 곳곳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양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필자는 의무지원 시스템 개발·운영 프로젝트를 발주하는 책임자 역할을 맡았다. 올림픽을 치러내기 위한 관련 건물들이 잠실 이곳저곳에 건립되었고, 선수·임원·대회운영요원은 물론 경기와 연관되어 다친 관중을 치료하기 위한 올림픽선수촌병원이 들어섰다. 병원장은 당시 백병원 부원장으로 활동하던 김용완 동문(연세의대 1949년 졸업)이 겸직하였다.

이전까지 치러본 경험이 없는 대형 국제 스포츠 이벤트였기에 더욱 완벽한 의무지원이 되도록 세심히 노력했다. 1984년부터 준비 작업에 돌입했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이 열리는 잠실 인근에 영동세브란스병원이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에, 올림픽 프로젝트 기획과 관리 단계부터 대표 병원으로 설정하고 계획을 수립했다. 마라톤대회 때 응급의료 시스템을 운용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기에 필자는 보건사회부 국장을 포함한 담당관들과 같이 병원을 방문하여 김영명 병원장을 비롯한 병원준비위원들과 의견을 나누고 시스템을 확인했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의무지원 지원체계는 물론, 혹시 발생할지 모르는 대형 사고 관리대책과 후송병원 관리계획, 의약품 공급계획 등 희박한 가능성을 지닌 상황까지 빈틈없이 챙겼기에 의료시스템에 전혀 공백 없는 스포츠 빅 이벤트를 치러낼 수 있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9월 17일부터 2주간 개최되었다. 관련된 준비는 김영명 병원장이 시행했고, 이어 8월에 취임한 김병길 병원장이 의무지원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했다.

의무지원 시스템 개발과 관리 운영 프로젝트 수행을 위해 총 1억 4,500만 원을 지원받았다. 올림픽선수촌병원에서 활용하기 위해 전자의무기록(EMR) 프로그램을 개발했고, 이후 필자가 1992년 세브란스병원 부원장으로 임명받았을 때 이 전자의무기록 프로그램을 더욱 발전시켜 세브란스병원에서 국내 최초로 운영했다.

강남지역 발전과 함께 이어진
의료 인프라 확충

1970년대 경제가 발전하며 자연스레 서울 도심 범위가 넓어졌고 한강 남쪽 지역에 대한 관심도도 상승했다. 당시 한강 남쪽에는 영등포가 발달한 부도심 역할을 했고 그 동쪽 지역은 논밭이었다. 영등포(永登浦)에서 첫 글자인 ‘길 영(永)’ 자를 따와 영등포의 동쪽을 모두 묶어 영동(永東)지역이라고 칭했다.

영동지구를 중심으로 한 의료 인프라 확충은 빠르게 진행됐다. 1980년, 당시 강남구(현 서초구) 반포동에 강남성모병원(지금의 서울성모병원)이 건립되어 강남지역 최초 대학병원으로 자리했다. 1989년에는 송파구에 서울아산병원이 개원했으며, 강남구에는 1994년 삼성서울병원이 문을 열었다.

연세대학교가 독일 정부 재정차관을 획득해 두 번째 병원을 건립하자, 고려대학교도 비슷한 절차를 거쳐 국무회의에서 독일 정부 재정차관 승인을 받았다. 이를 통해 구로병원과 안산병원이 건립됐다. 고려대학교 구로병원은 재정차관을 지원받은 이후 3년쯤 되는 1983년 9월에 개원했다. 구로구는 1980년에 영등포구에서 분리됐는데, 당시 수출산업공단이 구로구에 위치해 경제활동 인구 유입이 활발했다.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 주 후송병원으로 활약하면서 영동세브란스병원의 인지도와 위상은 이전보다 확연히 높아졌다.

유승흠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대한민국 건강보험의 탄생과 발전에 기여하고 병원 경영의 선진화를 학문적으로 뒷받침한 학자. 연세대보건대학원장, 대한민국의학한림원 원장, (재)한국의학원 이사장, 대한예방의학회 이사장, 학교법인 유한학원 이사장, 필란트로피 소사이어티 초대 회장 등을 역임했다. 대한민국 홍조근정훈장, 황조근정훈장을 받았으며, 현재 의료 소외계층에 의료비, 약제비를 모금·지원하는 한국의료지원재단 이사장으로서 활발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