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홍창희 강남세브란스병원 비뇨의학과 교수

1983년 4월 14일 목요일 오후 4시 봄비가 내리는 가운데 현재 2동 건물 1층 외래 공간에서 영동병원(개원 당시 병원명) 개원 봉헌식이 열렸다. 연세의료원이 경제기획원에 병원설립계획서를 제출(1975년 8월 16일)한 이후 8년 만이었고 기공식(1980년 5월 10일)을 시작으로 개원을 준비한 후 3년 만이었다. 이미 4월 4일에 첫 진료가 시작되었고 신축 건물은 현재의 2동으로 가동 병상은 284병상이었다.

연세의료원이 영동병원 건립에 착수하게 된 것은 1975년 6월경 경제기획원 장관과 연세대학교 의무부총장인 김효규 의료원장이 만난 점심 식사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독일에서 귀국하는 간호사 문제가 정부의 주요 현안으로 대두되면서 경제기획원장관이 김효규 의료원장에게 자문하는 자리였다. 정부는 1960년대 초부터 외자 유입과 잉여 노동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내 노동력의 해외고용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왔다. 1977년 독일 정부가 공식적으로 한국인 노동력 수입을 금지하는 조치를 시행할 때까지 간호사 11,057명이 독일로 향했다. 하지만 1970년 초부터 시작된 세계 경제공황으로 경기가 나빠지자 독일인 간호사들의 취업이 크게 늘어 독일 내에서 간호인력 확보가 수월해지면서 계약기간이 만료된 한국 간호사들을 돌려보내기 시작하였다. 1974년 독일 수도인 본(Bonn)에서 열린 정기 한독각료회의에서 독일 정부가 한국 측에 장기 저리 차관을 제공하고 이 차관으로 한국에 병원을 건립하여 귀국하는 간호사들을 재취업시키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영동병원 프로젝트

독일 정부의 제안과 경제기획원 장관의 자문에 응한 의료원은 재원만 확보할 수 있다면 신촌 연세의료원 부지에 2,000병상 규모의 새로운 병원을 짓고 독일에서 귀국하는 간호사들을 취업시켜 귀국하는 간호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답하였다. 이미 김효규 의료원장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어울리는 1,000~2,000병상 규모의 새병원을 현 간호대학 자리에 신축할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독일의 장기 저리 차관을 연세의료원의 의료확충사업과 연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차관사업의 타당성을 조사하기 위해 내한한 독일 조사단은 의료원을 방문하여 신촌 의료원 부지에 병원을 신축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미 대학병원급 시설을 갖추고 있다는 게 이유였다. 이런 연유로 다른 지역에 병원을 짓는 계획에 착수하였는데 이때 마련된 것이 ‘영동병원 프로젝트’이다. 개발이 진행 중인 강남 지역은 1978년까지 인구가 100만 명까지 늘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만족할 만한 의료시설이 없었다. 이에 도곡동에 500병상 규모의 종합병원을 건립하고 영동지역과 의료취약지구인 성남시, 용인 및 광주군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 직접적인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당시 용인과 광주군 농촌지역에서 의료시설이 없는 곳은 8개 지역이었는데, 이동진료반을 구성하여 정기적 방문 진료를 시행하고 4년 내에 이 지역에 진료소를 설치한다는 계획이 포함되었다. 이미 의료원은 지역사회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지역사회보건사업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1972년부터 연희지역 내 영세민을 위한 보건관리를 실시해왔고 1974년부터는 강화군에 연세대학교 보건원을 설립하여 농촌 주민을 위한 지역사회보건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또 강원도 전역의 수많은 무의촌을 대상으로 이동진료반을 구성하여 진료 혜택을 제공하고 있었다. 개발 중인 영동지구뿐만 아니라 무의촌 주민에게까지 의료혜택을 제공하고 이동진료반, 진료소의 최종 후송병원으로서 역할을 담당하여 효율적인 의료전달제도를 구축하는 시범사업도 계획하고 있었다. 강남세브란스병원이 영동개발지구 최남단인 도곡동 매봉산 자락에 자리하게 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독일에서 귀국하는 간호사에게 재취업을 위한 재교육과 취업의 기회를 제공하는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우여곡절 많았던 건립계획

의료원은 1976년 6월 1일에 영동병원 설립계획서를 경제기획원에 제출하였고 7월 1일 독일에서 열린 한독경제각료회의에서 영동병원 프로젝트에 1,500만 독일마르크(45억 원)를 할당하는 기본 방침에 합의하였다. 이후 김효규 의료원장이 독일을 방문하여 독일 정부가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고 9월 17일 현 병원 부지를 매입하였다. 재원은 남대문 세브란스병원 토지를 수용하고 서울시로부터 받은 보상금과 재단 보조금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있던 중 보사부(보건사회부, 현 보건복지부에 해당)에 의해 변수가 발생하였다. 당시 보사부는 의료기관이 부족한 무의촌 해소를 위해 의료취약지역에 병원들을 건립하는 의료균점정책을 수립하여 추진하고 있었다. 개발 중인 서울의 강남에 공공차관으로 대형 사립병원을 건립하는 것은 의료균점정책과 배치된다는 주장이었다. 의료원은 보사부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입장이어서 영동병원 프로젝트의 수정이 불가피하였다. 의료원 산하에 영동병원(250병상), 성남병원(100병상), 인천 주안산업병원(50병상) 등 3개 병원을 건립하고 영동병원의 분원으로 용인병원(30병상), 성남병원의 분원으로 광주병원(30병상)을 건립하는 내용을 담아 총 5개 병원을 신축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강남세브란스병원 입장에서는 병상이 250병상으로 줄었고 담당지역도 서울 영동지구와 용인군으로 축소된 셈이다. 계획 변경에 따른 정부 부처 간 의견 조율과 한독 간 합의를 다시 거치다 보니 영동병원 프로젝트의 진행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이후 독일재건은행(KFW, 독일의 차관선)의 타당성조사가 완료되어 1978년 4월 독일 본에서 열린 한독경제각료회의에서 독일 정부가 연세의료원의 영동병원 설립안을 최종 승인하였다. 10월 20일에 비로소 독일재건은행과 한국정부 및 연세의료원 간 차관협정서가 조인되어 공식적으로 독일 공공차관이 확정되었다. 차관 조건은 10년 거치 20년 상환에 이자는 2%로,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병원 설립 준비에 들어갔고 1980년 5월 10일 영동병원 건축 기공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영동병원 신축공사 외에 1981년 3월에 성남병원 부지 매입, 6월 용인병원 부지 매입, 7월 광주병원부지 매입을 완료하고 각 병원 설계와 감리계약까지 진행하였다.

1981년 9월 들어 보사부에 의해 또 다른 변수가 발생하였다. 성남병원 설립 계획이 중지된 것이다. 보사부는 1978년부터 일본에서 공공차관(OECF KO-12, KO-17)을 도입하여 공업단지와 의료취약지구에 민간병원을 건립하고 의료시설을 현대화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성남지역에 민간병원을 설립하겠다는 지원자가 나선 것이다. 의료원에서는 성남병원 계획을 제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여 토지 매입 및 건축설계와 감리계약을 위해 지출한 경비를 보상받고 성남 OECF 차관병원에서 귀국하는 파독 간호사를 우선적으로 취업시키는 선에서 성남병원 문제를 매듭지었다. 인천주안병원은 1982년 5월 25일에, 용인병원과 광주병원은 5월 26일에 거의 동시에 기공식을 거행하여 공사에 착수하였다.

대학병원급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영동병원 개원의 의의

영동병원은 1983년 4월 14일 284병상으로 개원하였다. 용인과 광주에 2개 분원을 두었는데 1983년 4월 15일에 각각 30병상으로 개원하였다. 인천 주안병원까지 포함한 4개 병원의 대지 매입과 건축비는 124억 원 상당으로, 재단과 의료원에서 조달되었다. 장비 구입비는 53억 원 상당으로 이 중 45억 원이 독일의 공공차관으로 조달되었다. 영동병원은 공사에 착수한 지 3년 만에 개원하였다. 공사가 장기화된 주요 원인은 독일재건은행과의 의견 조정 때문이었다. 원래 합의된 계획은 250병상을 갖춘 6층 건물 신축이었다. 의료원 측은 수년 후에 반드시 영동병원의 병상 확충 문제가 대두될 것이기 때문에 골조공사만이라도 500병상 규모로 진행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하여 2개 층을 증축하여 8층 건물을 신축하는 것으로 독일재건은행과 합의에 들어갔다. 다행히 의료원의 끈질긴 노력과 설득으로 합의를 이끌어냈고 개원 이후 내장 공사를 진행해 1984년 2월 1일에 7~8층 병동을 가동하여 459병상으로 확대 운영할 수 있었다. 1983년에 의료원 산하에 4개 병원이 신설, 개원하면서 연세의료원은 국내 최대의 의료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연세의료원의 의료시설 확충사업은 파독 간호사의 재취업 문제로 시작되었지만 성남병원 건립이 취소되면서 영동병원은 파독 간호사의 재취업을 위한 재교육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계획이 축소되었다. 하지만 본원에 취업을 희망하는 파독 간호사 6명을 선발하여 개원 당시부터 근무하게 되었다.

개원 당시 의료시설이 취약했던 영동지역과 용인·광주군 주민들에게 대학병원급 의료서비스를 제공했던 영동병원은 개원 40주년을 맞이하는 현재 전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찾아오는 병원으로 발전하였다. 영동병원이 개원 당시부터 광주분원, 용인분원과 의료전달체계를 구축하고, 영동지역 내 개원의와 긴밀한 유대를 통해 의료전달체계를 구축했던 경험은 현재 전국적인 진료협력체계로 발전하였다. 개원 후 40년을 되돌아보면 개원을 준비한 8년간 겪은 우여곡절은 난관과 희망이 혼재했던 기간에 채워진 노고와 땀이었고 강남세브란스병원을 40년 동안 지탱해준 주춧돌이었다.

강남세브란스병원 개원과 관련된
주요 참고문헌

1. 연세대학교 연세의료원,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영동병원 설립계획서』(1976. 6. 1.)

2. Yonsei University Medical Center, 『The Yongdong Health Service Project』(1977. 3. 15.)

3. 영동지역 의료확충사업본부, 『영동지역 의료확충사업 중간보고』(1982. 4. 12.)

4. 연세의료원, 『영동지역 의료확충사업의 백서』(1982. 10. 14.)

5. 김효규, 『향린동산에서의 회상』(도서출판 큐라인, 1998.)

홍창희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강남세브란스병원에서 비뇨의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학과 겸임교수로도 재직하면서 의사학 연구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