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파연합과 교육체제 정비에 따른
세브란스의 해방 이전 명칭 변화
글 김영수 의사학과 교수
1885년 개원해 130년이 넘은 세브란스병원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병원이다. 개원 초기에 병원 운영과 관련하여 선교부와 조선 정부 간 불협화음으로 어려움에 봉착한 적도 있었지만, 다각도로 노력하며 힘든 시간을 이겨냈다. 특히 36년의 식민 지배를 받는 동안 세브란스는 한국 의학교육의 자립과 발전을 위해 체제와 경쟁하고 타협하며 인고의 시간을 견뎌냈다. 그 모습은 세브란스의 명칭이 변경되는 과정에도 잘 나타나는데, 이는 교파연합과 교육기관 관련 법령 정비와 관련이 깊다.
세브란스병원의 전신인 제중원은 개원 초기 정부와 미북장로회 선교부가 운영했지만, 1894년 선교부가 제중원의 운영권을 이양받은 후에는 전적으로 선교부의 책임하에 운영되었다. 병원의 운영비용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도 큰 문제였지만, 의료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는 의학지식과 기술을 어떻게 전수할 것인가가 더욱 큰 문제였다.
제중원 제4대 원장 에비슨은 제중원 개원 후 중단되었던 의학교육을 1895년에 재개하고, 해부학 교과서를 번역하여 더 많은 한국인 학생들이 의학교육에 참여할 수 있도록 계획했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 달리 1900년 안식년을 지내고 한국에 돌아와보니 학생들은 모두 떠나고 없었다. 이후 세브란스 씨의 지원을 받아 1904년 남대문 밖 복숭아골에 병원을 신축하고, 의료선교사 허스트(Jesse W. Hirst)가 합류하면서 의학교육은 큰 전기를 맞이했다.
새로 지어진 현대식 건물에서 학생들은 충분히 임상 실습을 진행할 수 있었고, 교과서의 한글 번역이 한창 진행되며 의학교육이 확대되는 가운데, 1908년 6월, 한국인 의사 7명이 탄생했다. 이들은 한국의 의학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고, 의술개업인허장이라는 의사면허를 발급받은 첫 한국인 의사들이었다. 의료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일궈낸 세브란스의 의학교육이 첫 결실을 맺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사건으로 기록된다.
제1회 졸업생이 배출된 후 선교사들에 의한 의학교육의 지형이 달라졌다. 세브란스에서 공식적인 면허를 받은 의사를 배출하자 학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북장로회 의료선교사로 구성된 교원만으로는 교수진이 부족했다. 이 시기는 각지에서 활동하던 각 교파의 선교사들이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는 의학교육의 비효율성을 인식하며 의학교육의 중추가 되는 연합의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제기하던 때였다. 세브란스병원의학교가 물망에 올랐고, 그 결과 세브란스병원의학교는 각 선교지부의 동의와 지원하에 연합의학교육기관이 되었다.
1922년 개정 반포된 「조선교육령」
(출처: 조선총독부관보)
각 교파에서는 매년 일정 기간 의료선교사를 파견하기로 결의하여 1912년부터 파견했고, 1913년에는 여러 선교부가 공동으로 운영하는 연합의학교가 출범했다. 기존의 미북장로회 이외에도 남장로회, 남감리회, 감리회는 전임 교원을,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는 단기적으로 교원을 파견했고, 캐나다 장로회도 합류하여 연합 체제하에서 한반도 각지에서 활동하던 의료선교사가 세브란스에 파견되어 교육과 진료를 담당했다. 이로써 세브란스는 전공 분야별로 교원을 확충하며 변화하는 의학교육환경에 대비할 수 있었고, 운영 주체가 달라짐에 따라 교명도 변경되었다. 병원명은 그대로 세브란스병원이었으나, 세브란스병원의학교는 ‘세브란스연합의학교’로 개칭되었다. 이로써 소수의 미북장로회 소속 선교사가 진행하던 의학교육에서 범위를 넓혀 명실공히 한국의 대표적인 사립의학교로서 명성을 굳혀나아갔다.
1904년 지어진 세브란스병원 건물
(출처 : 1917년 졸업앨범)
세브란스연합의학교로 출범하며 신축한 건물.
건물에는 Severance Union Medical College라는
교명이 적혀 있다.
(출처 : 1929년 졸업앨범)
1938년에는 교명에서 '연합'이 사라졌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라고 명명했다.
(출처 : 1938년 졸업앨범)
그러나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정치적 상황은 교파연합으로 교원을 확보하고, 체계적인 의학교육을 실시하는 것 외에도 외형적인 변화를 촉구했다. 1913~14년에 조선총독부가 반포한 「의사규칙(醫師規則)」, 「의사시험규칙(醫師試驗規則)」에 따라 조선총독부가 지정한 의학교를 졸업하거나 조선총독이 정한 의사시험에 합격해야 의사면허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즉, 세브란스연합의학교는 조선총독이 지정한 학교가 아니었으므로, 졸업한다고 해도 바로 의사면허를 받을 수 없었고, 졸업생들은 정식 의학교육을 받지 않은 5년 경력자와 동등한 자격만 갖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차별적인 규정은 세브란스 의학교육의 존립 근거를 흔들었고, 재정비를 촉구했다. 게다가 1915년에는 「전문학교규칙」과 더불어 「사립학교규칙」이 반포되면서 사립전문학교 개설은 더욱 까다로워졌다. 개설을 위해서는 조선총독의 인가가 필요했고, 재단법인으로 자산을 보유해야 했으며, 교원의 자격, 교과과정, 교수 용어 등도 조선총독의 인가를 받아야 했다.
이에 세브란스연합의학교는 1917년에 에비슨 교장을 이사장으로, 반버스커크 교수를 부이사장으로 하는 이사회를 구성하여 재단법인과 전문학교 설립을 청원했고, 1917년에는 전문학교 설립을 인가받았다. 이때부터 세브란스연합의학교는 ‘사립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로 개칭되었다.
전문학교로 인정받고 의사를 배출하던 세브란스는 1920년대에 들어 또다시 교육과정과 교수진을 정비해야 했다. 당시 세브란스와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맡은 에비슨은 양교를 통합하여 대학으로 승격하고자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는 식민지 조선에 ‘사립’대학이 관립대학보다 먼저 설립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조선교육령」 개정안을 반포하여 전문학교의 승격 조건으로 시설 완비와 교수진의 충실도를 따졌고, 결과적으로는 에비슨의 대학설립안은 좌절되었다. 다만 법령의 반포로, 세브란스는 구미 의학교 출신의 교수진을 충원하고, 유능한 교원을 해외에 유학시켜 학위를 받아오도록 하는 등 교수진과 교육체계를 재정비했고, 개정 「조선교육령」에 따라 다시 인가를 받으면서 학교명도 ‘사립’을 뺀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이하 세브란스의전)’로 개칭되었다. 이에 1923년 2월 이후 본과 졸업생은 의학사 학위와 함께 무시험으로 의사면허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후 1934년에는 「의사법」 제1조가 지정하는 학교가 됨에 따라 세브란스의전 졸업생은 내무성 의사면허를 부여받아 한국뿐만 아니라 대만, 남양군도, 만주국에서도 자유롭게 개업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1938년부터 선교부의 교파연합을 상징하던 ‘연합’이 교명에서 사라졌고, 태평양전쟁이 한창이었던 1942년에는 아사히의학전문학교로 개칭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그러나 시련 속에서도 다른 학교와 달리 일본인 졸업생을 한 명도 배출하지 않고 한국인 의사만 양성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배출된 졸업생은 해방 후 한국 의학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