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혜원에서 제중원으로
세브란스의 시작
글 이경록 의사학과 교수
연세의료원을 일컫는 표현은 다양하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세브란스병원’은 기부자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오랜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고취하기 위해 ‘제중원(濟衆院) 137주년’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이 외에 ‘광혜원(廣惠院)’이라는 이름도 있다. 들어본 적은 있으나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 설명하려면 약간 주저되기도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광혜원과 제중원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한다. 1885년 연세의료원의 초창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1884년 12월에 한국 근대사를 뒤흔든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당시 조선에 부임한 지 3개월밖에 안 된 의료선교사 알렌(H. N. Allen)은 갑신정변 와중에 부상을 입은 민영익을 성공적으로 치료했다. 이를 계기로 고종의 신임을 얻은 알렌은 서양의학을 시술하는 병원의 필요성을 조선 정부에 공식적으로 제안했다. 이른바 ‘병원건설안’이었다.
알렌은 병원건설안에서 갑신정변 이래 많은 환자를 치료했지만 적절한 치료시설이 없어 곤란을 겪고 있는 형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서 새로 병원을 건설하게 되면 치료와 의학교육을 동시에 실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알렌 자신은 무보수로 병원의 책임을 맡고 조선 정부에서는 병원 운영의 필요경비만 부담하면 된다는 운영원칙까지 제시했다.
이 병원건설안은 1885년 1월 22일에 작성돼 5일 뒤에 조선 정부에 접수되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이 제안을 수용한다고 2월 18일에 공식적으로 통보했다. 이 병원은 홍영식의 집을 활용했으며, 4월 초에 완공되었다. 현재 종로구 재동에 있는 헌법재판소 자리에 해당한다.
알렌의 병원건설안(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원래는 4월 3일에 치료를 시작할 계획이었으나 실제 운영은 며칠 연기되었다. 진료는 4월 9일에 시작했지만, 공식 기록인 알렌의 ‘1차년도 보고서’에는 “1885년 4월 10일에 특별한 의식없이 개원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이 기록을 근거로 연세의료원과 연세대학교는 1885년 4월 10일을 정식 개원일이자 개교일로 기념하고 있다. 그런데 4월 10일에 개원은 하였으나 아직 병원 이름은 없는 상태였다. 알렌은 병원의 성격에 초점을 맞춰서 ‘왕립병원’[His Corean Majesty’s Hospital]이라는 명칭을 제안했을 뿐이며, 정식 이름이 정해지기 전에는 단지 ‘병원’(Hospital, 施醫院)이라고만 불렀다. 조선 정부의 『비변사 등록』과 『알렌의 일기』에 따르면, 4월 12일에 고종이 의정부의 건의를 윤허하여 병원 이름을 확정했다. 바로 ‘백성들을 널리 구제하는 병원’이라는 의미의 광혜원(廣惠院)이었다. 연세의료원의 공식적인 최초 명칭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광혜원보다 제중원이라는 단어에 더 친숙하다. 그 이유는 광혜원이라는 명칭이 4월 12일에서 4월 26일까지 불과 14일밖에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동안 광혜원에서 제중원으로 개칭된 정확한 날짜와 자세한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다. 1885년의 기록들이 나중에 정리되면서 표기와 정보가 뒤섞인 탓이었다.
실제로 제중원으로 명칭이 바뀐 시점은 『고종실록』에 실린 대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광혜원을 제중원으로 개칭하자”고 아뢴 4월 26일이다. 제중원으로 개칭한 배경에 대해서는 주무부서인 외아문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일기』가 가장 믿을 만한데, 문제는 ‘제중원으로 개칭한다’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일기』 기록이 며칠 전인 4월 21일 자에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난점은 규장각에서 원본을 확인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즉,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일기』를 살펴보았더니 ‘제중원으로 개칭한다’는 문장이 문서의 위쪽 여백에 추가로 기재되어 있었다. 이것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일기』 기록을 나중에 정리하면서 찌지[箋]를 덧붙였다는 의미였다. 이 때문에 개칭 날짜에 혼선이 빚어졌으며, ‘제중원’이라는 명칭은 4월 26일부터 사용된 것이 분명해졌다.
현재의 헌법재판소 백송 뒤편에 자리 잡았던 광혜원
(출처: 동은의학박물관)
광혜원 건물(출처: 동은의학박물관)
이어서 ‘제중원’이라는 표현은 하루가 지난 4월 27일부터 곧바로 사용되었다. “제중원에서 여병원(女病院)을 함께 세웠으니 13세에서 16세 사이의 기녀(妓女) 가운데 총명한 사람 2~3명을 특별히 선발하여 이곳(제중원)으로 올려보내 의술(醫術)을 익히게 하라”는 기록이 보인다.
‘제중원(濟衆院)’이라는 명칭에는 조선 정부의 의료정책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국가 또는 지배층이 주체가 되어 빈민을 진휼하고 질병을 치유한다는 시혜정책(施惠政策)이었다. 즉, ‘발정시인(發政施仁)’과 ‘박시제중(博施濟衆)’의 이념 아래 사회적 약자인 환과고독(鰥寡孤獨)을 진휼하고 질병을 치유하겠다는 의지였다. 조선 정부의 의지는 “질병이 있는 자는 누구나 내원하여 치료를 받으라”라고 하면서 무료 치료를 알린 4월 3일의 외아문 게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광혜원’과 ‘제중원’이라는 명칭에는 조선 정부의 전통적인 의료정책이 준용(遵用)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제중원은 파탄 난 국가 재정과 관리들의 부패로 위기에 처했다. 이에 1893년에 내한하여 제중원 원장으로 근무한 에비슨(O. R. Avison)은 조선 정부와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 1894년에 제중원 운영권이 미 선교부로 이관됨으로써 제중원은 독자적인 기관으로 변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