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의학을 개척한 세브란스

국문 의학 교과서 편찬의
선구자적 의의

 연세의대 여인석 의사학과 교수

한국의학사 연구의 태두로 서울대 교수를 역임한 김두종 박사는 이제는 고전이 된 『한국의학사』에서 세브란스병원의 역사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우리나라에 전해 온 근세 의학의 역사 중에 가장 광채 있는 페이지를 차지한 것도 세브란스 병원이거니와, 우리 의학의 발전적 과정에 있어서 민족적 고난과 호흡을 같이하게 된 것도 세브란스병원이다.”(486쪽). 세브란스에 대한 김두종 박사의 평가는 한마디로 ‘세브란스는 한국 의학의 개척자’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사실 한국에 서양의학이 수용된 이래 세브란스가 개척해온 분야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아 이를 짧은 글에서 다 소개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여기서는 특별히 에비슨에 의해 기획된 국문 의학 교과서 편찬이 가지는 선구자적 의미를 새겨보고자 한다.

조금 다른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2000년 이후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은 일본인은 거의 20명에 달한다(2000년 이전은 5명). 매년 1명꼴이다. 흔히 일본도 우리와 유사하게 입시 위주의 주입식 교육을 하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에 대해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어느 일본 과학 기자의 설명에 크게 공감했다. 그의 설명은 간단하다. 일본어로 축적된 고급 과학 지식이 많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기만의 독창적인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지식을 충분히, 정확하게 습득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과정을 모국어로 밟는 일본인과 외국어로 된, 소위 ‘원서’로 느리게, 때로는 부정확하게 이해하는 시행착오를 거치며 밟아가는 한국인 사이에 차이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 결과가 24:0이라는 객관적 수치로 나타난 사실을 우리는 불편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모국어로 과학 지식을 쌓아가는 일은 이처럼 중요하다. 100여 년 전, 서양의학이란 새로운 과학 지식을 한국어로 된 지식체계 안에 쌓아가는 일을 시작한 개척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들의 존재와 업적은 극소수의 한국의학사 연구자들 외에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1886년 문을 연 제중원 의학당은 학생 13명을 선발해 야심 차게 의학교육을 시작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로 돌아갔다. 실패 원인으로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아마도 언어 문제가 가장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적절한 국문 의학 교과서가 없었던 것이 깊이 있는 공부를 어렵게 만든 요인이었을 것이다. 1893년 내한한 에비슨이 제중원의 운영 못지않게 큰 관심을 가진 것이 의학교육이었다. 의학교육을 위해 그가 최우선으로 시도한 작업이 다름 아닌 국문 의학 교과서의 편찬이었다. 에비슨이 알렌에 의한 최초 의학교육의 실패 사례를 참고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의학교육의 성패는 국문 의학교재의 편찬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교과서 편찬에 쏟은 노력을 설명하기 어렵다.

의학교육의 시작과 함께 그는 의학의 기초가 되는 해부학 교과서의 한국어 번역에 착수했다. 그는 조선의 고전과 영어를 아는 젊은이를 찾아 그와 함께 영어권의 대표적 해부학 교과서인 그레이 해부학의 번역에 착수했다. 1897년경에는 번역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당연히 최초의 한국어 번역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양의학에는 많은 전문용어가 있으며 그중에서도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인체의 각 부분을 나타내는 해부학 용어이다. 나름의 기원을 가지며 인체 구석구석의 미소한 부분까지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진 수많은 해부학 용어에 대한 정확한 번역어를 찾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에비슨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선행 작업(예를 들어 일본어나 중국어로 번역된 해부학 서적)을 참고하지 않고 오직 한국인 조수의 도움을 받아 원래의 의미에 맞는 한자 용어를 만들어내는 어려운 과정을 거쳤다. 그나마 적절한 번역어를 찾아내지 못해 음역으로 대체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과연 그들은 낯선 서양 해부학의 용어를 한국어로 어떻게 옮겼을까?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실상을 알 수 없다. 에비슨은 1899년경 준비된 번역 원고를 조수에게 맡기고 안식년을 떠났다. 그런데 에비슨이 한국을 떠나 있는 동안 그 조수는 죽었고 관습에 따라 죽은 자의 옷가지와 소지품은 불태워졌다. 이 과정에서 그가 갖고 있던 번역 원고도 재로 변했다.

1년 후인 1900년에 돌아온 에비슨은 이 사실을 알고 다시 번역 작업에 돌입했다. 이번에는 해부학 교과서뿐 아니라 의학 공부에 필요한 다른 과목의 교과서도 번역했다. 그리고 처음 번역할 때와는 달리 전문용어 번역을 위해 중국어와 일본어로 된 의학 교과서를 구해 번역에 참고했다. 양자 모두 한자로 용어를 만들었지만 서로 다르게 번역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즉, 중국어와 일본어로 된 의학 교과서를 참고함으로써 이전처럼 전무한 상태에서 새롭게 용어를 창조해야 하는 어려움은 크게 덜었지만 같은 한자의 용례나 이를 이용한 단어 구성의 방식이 중국이나 일본과는 또 달랐던 까닭에 그대로 가져와 쓸 수 없는 용어도 적지 않았고 그럴 때는 결국 한국어에 적합한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일본과 중국 의학서적을 참고하여 번역한 두번째 그레이 해부학 번역 원고도 출판되지 못하고 불에 타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해부학 교과서가 없이 의학 공부를 시작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에비슨은 세 번째 해부학 교과서 번역 작업에 착수했다. 이번에는 그레이 해부학 번역을 포기하고 일본인[今田束]이 쓴 해부학 책을 번역하여 1906년 제중원에서 출판했다. 제중원 의학 교과서는 1905년에서 1910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출판되었다. 에비슨의 의학 전 분야의 국문교과서 편찬을 목표로 했다. 의학뿐 아니라 의학의 기초가 되는 자연과학 교과서도 펴냈다. 무기화학 교과서(1906)와 유기화학 교과서(1909)가 그것이다. 에비슨의 이러한 노력은 상당한 성과를 이루어 1910년 무렵에는 이미 출판된 교과서도 여러 종류가 있었고, 곧 출판을 앞둔 책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한일합병조약으로 에비슨의 이러한 노력은 허사가 되었다. 총독부가 모든 학교에서 일본어 교재만 허용했기 때문이었다.

에비슨의 국문 의학 교과서 편찬은 단순히 의학 교재를 만드는 차원의 작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서양의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한국어라는 언어 체계 속에 수용하는 선구적인 작업이자, 한국어로 축적된 지식의 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중요한 작업이었다. 만약 우리가 식민지배라는 민족사의 단절을 겪지 않고 에비슨의 작업이 지속해서 이루어졌다면 우리는 이미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여러 명 배출한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국제화 시대에 영어의 중요성을 간과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원찮은 연구 성과를 아무리 매끈한 영어로 표현해도 좋은 평가를 받기는 어렵다. 언어적 유창함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독창적 아이디어다. 영어가 시원찮아 노벨상 수상 연설을 일본어로 한 일본 학자도 있었지만, 누구도 그의 부족한 영어 실력을 탓하지 않았다. 에비슨은 이미 100년 전에 한국 의학이 나아갈 방향을 선구자적 혜안으로 제시했다. 불행한 역사로 실현되지 못했던 에비슨의 뜻을 이어받아 한국어 안에 고급 의학 지식을 쌓아가고 이를 토대로 한국 의학을 새롭게 개척해나갈 책임은 우리 후학들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