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비슨에서 오긍선으로,
세브란스의전 교장의 이양 과정
한국인의 의학교육은
한국인에게 맡겨야 한다
글 홍창희 비뇨의학과 교수
1934년 2월 16일, 세브란스의전 도서관에서 74세 나이로 선교 의사직에서 은퇴하는 에비슨(Oliver R. Avison)의 후임으로 오긍선이 세브란스의전 교장으로 선출되었다. 에비슨은 1893년 8월 조선 선교의사로 서울에 도착한 이후 제중원 4대 원장, 세브란스병원 초대 원장, 세브란스의전 교장으로 40년 동안 재직했고, 특히 조선인 의사 양성을 위한 의학교육체계를 설립하여 한국 근대 의학의 스승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오긍선은 1907년 루이빌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12년부터 세브란스 의학교 교원, 1917년부터 피부 및 생식비뇨기병과 과장과 교수, 1922년부터 세브란스의전 학감, 1932년부터 부교장으로 재임하면서 전염병실 신축 모금, 학교 운영과 세브란스의전의 총독부 지정에 큰 활약을 했다.
에비슨은 1916년부터 본인을 지척에서 보좌하고 오랫동안 부교장직을 맡아온 반버스커크(James D. Van Buskirk) 대신에 오긍선을 1932년부터 부교장으로 발탁했고, 1934년에는 미국인 선교사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오긍선을 교장에 임명했다.
이러한 에비슨의 인사조치는 ‘한국인의 의학교육은 한국인에게 맡겨야 한다’는 교육가다운 신념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알려졌다. 일부에서는 오긍선을 부교장에 발탁할 때부터 반발했던 반버스커크가 오긍선을 후임 교장으로 선임하자 불만을 품고 본국으로 돌아가버렸다는 일화를 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긍선과 반버스커크의 이야기는 당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회고에 따른 것이며, 사실과 다르다.
1931년 1월 부교장이었던 반버스커크는 건강상 이유로 미국으로 돌아갔다. 부교장의 부재로 이때부터 오긍선이 부교장 권한대행(acting vice-president)을 맡은 것이다. 1932년 3월에 열린 세브란스재단 이사회 회의에서 1년 넘게 병가로 미국에 머물러 있던 반버스커크가 건강상 이유로 부교장직을 사퇴한다는 의사를 알려왔다. 이 회의에서 반버스커크의 부교장 사임을 채택했고 후임으로 오긍선이 부교장으로 임명된 것이다.1) 2년 뒤 에비슨이 은퇴하면서 후임 교장을 결정할 때 반버스커크는 이미 선교사직을 사퇴한 상태였다.
후임 교장을 결정하는 1934년 2월 세브란스재단 이사회에서 에비슨은 교수, 학감, 부교장직을 훌륭하게 수행하여 동료, 학생, 환자와 재단이사들로부터 신임을 받고 있는 오긍선을 추천하며 에비슨을 이을 가장 적합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라고 강조했다. 에비슨은 세브란스의전 교장으로 오긍선을 만장일치로 선출해줄 것을 부탁했고 투표에 붙여졌다. 이사 28명이 투표에 참여했고 만장일치로 오긍선이 새로운 교장에 선출되었다.2) 일부 선교의사들이 오긍선의 교장 선임에 반발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었다. 선교사들의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오긍선의 교장 선임에 반발했다기보다 세브란스의전이 문부성 지정을 추진했던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오긍선이 학감으로 있을 때인 1923년 2월 24일 총독부 고시 제34호로 세브란스의전은 총독부 지정학교로 인가되었다. 1917년 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었지만 총독부 지정 의학교가 아니어서 졸업생들은 총독부 의사시험에 합격해야 의사면허를 취득할 수 있었다.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의사시험 없이 의사면허를 취득했던 것과 비교하면 차별을 받고 있었던 셈이다. 실제 총독부 지정을 받기 전 1914년부터 1922년까지 총 92명이 졸업했지만 의사시험에 합격하여 의사면허를 취득한 졸업생은 76명으로, 전체 졸업생의 83%에 그쳤다. 1923년 졸업생부터 총독부 지정학교 졸업생으로서 의사시험 없이 의사면허를 취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또한 한반도 내에서만 의사로 활동할 수 있는 한지면허로, 일본뿐만 아니라 대만, 남양군도, 만주국, 브라질, 영국에서도 개업할 수 있었던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생의 의사면허와는 차별화되었다.
1926년 12월에 세브란스의전이 일본 문부성 당국에 문부성 지정을 신청했다. 문부성 지정을 위해서는 교사 증축 및 시설 확충, 교수진 보강, 교과과정 보완 등이 필요했다. 1933년 11월 14일 문부성 시찰위원인 교토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모리시마(森島庫太), 도쿄제국대학 의학부 교수 하야시(林春雄) 박사가 세브란스의전을 시찰했다. 1934년 2월 7일 동경 문부성 직원이 경성에 도착하여 2월 8일 졸업생을 대상으로 내과, 외과에 대한 학술시험을 시행했고 그 답안을 동경 문부성으로 가져가 채점했다.3) 채점 결과 세브란스의전은 1934년 4월 10일 문부성고시 제34호로 문부성 지정을 받고 1934년 졸업생부터 한반도 밖 지역에서도 의료행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한지면허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일본 문부성 통제를 철저하게 받게 되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의료선교사들도 일제의 통제에 우려를 나타냈다. The Korea Mission Field 기고글4)에서 세브란스의전의 문부성 지정에 부정적인 의견을 개진했던 E.W. Demaree가 대표적이다. Demaree는 원산에서 활동했던 선교의사로, 남감리교를 대표해서 세브란스의전 이사로 활동했다. 세브란스의전 졸업생들을 일본식 의료제도에 종속시킴으로써 서양 의료선교사들의 축출을 이끌고 일본의 열등한 의료 관행이 만연하게 만들며, 간호업무의 수준을 낮출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신앙자세를 퇴보시킨다는 것이다. 가장 우려했던 것은 의료선교사들의 축출이다. 문부성 기준에 따르면 각 과목의 주임교수는 일본 박사학위를 보유하고 있어야 했다. 미국이나 영국, 독일 등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교수도 다시 일본 박사학위를 받아야 했다. 실제 의료선교사들은 교실 강의에서 배제되었고 외래나 입원실에서의 임상강의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문부성 지정 이후 해방 될 때까지 장로교회에서 조선으로 새롭게 파송된 의료선교사는 한 명도 없었다. 이에 대해 에비슨은 모국 선교부에서 경제공황 이후 기부금 모금이 줄어 의료선교사를 추가로 파송할 경제적 여유가 없으며 이미 1934년까지 세브란스의전에서 총졸업생 352명을 배출했고 선교사들의 감독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발전했다고 기술하면서 한국인들에게 많은 책임을 지울 수 있게 된 것이 기쁘다고 했다.5)
1912년부터 조선 첫 외과 전문의로 세브란스의전 외과학교실의 책임자로 세브란스병원 외과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러들러(Alfred I. Ludlow) 교수는 의료선교사 수6)는 줄겠지만 선교사 수의 증가나 감소의 문제보다도 공동관리를 통해 더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7)
1934년 한국인 오긍선 교장의 취임은 세브란스의전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교장(오긍선), 학감(윤일선), 병원장(이영준)을 비롯해 대부분 학과의 주임교수가 한국인으로 바뀌었고 ‘한국인의 의학교육은 한국인에게 맡겨야 한다’는 에비슨의 신념이 실현되었을 뿐만 아니라 초기 선교의사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한국인과 의료선교사들이 공동 협력해 한국인으로의 점진적 이양을 완료할 수 있는 시발점이었다.
1904년 세브란스병원 전경
1) 세브란스재단 이사회 회의록, 1932년 3월 31일.
2) 세브란스재단 이사회 회의록, 1934년 2월 16일.
3) 「世醫專校 文部省서도 正式指定 十日에 認可를 通達 깃붐을 못참는 吳校長談」, 『매일신보』, 1934년 4월 12일
4) E. W. Demaree, “The future of medical missions in Korea”, The Korea Mission Field, 4(April), 1934, 74-76.
5) O. R. Avison, “The future of medical missions”, The Korea Mission Field, 6(Jun), 1934, 111-116.
6) 오긍선 교장 취임 당시 의료선교사(재직기간, 해당과); A.I. Ludlow(1912-1938, 외과), C.I. McLaren(1913-1938, 신경정신과), J.L. Boots(1921-1939, 치과), J.A. McAnlis(1921-1941, 치과), D.B. Avision(1923-1940, 소아과), N. Found(1927-1935, 내과), S.H. Martin(1927-1940, 내과), E.W. Anderson(1933-1940, 이비인후과)
7) A. L. Ludlow, “A few reflections on devolution”, The Korea Mission Field, 2(February), 1935, 29-31.